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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게와 새우를 먹다가 문득 바다를 통째로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꽃게 살을 발라 삼킬 때마다 새우 껍질을 까 입속에 넣을 때마다 점점 배 속이 영종도나 무의도가 된다 가끔은 파도에 쓸려 간 발자국까지 밀려 나온다 곧 인어나 용궁의 소식까지 도착...

고경옥의 ‘숲길’에서 여기에 소개하는 글은 고경옥이 대구문학 2021년 월호에 발표한 소설의 첫머리이다. 소설은 19페이지나 이른다. 일반 소설은 이야기를 진행하는 향식인데, 이 소설은 ‘숲길’이 주인인 듯, 처음부터 끝까지 첫머리 글처럼 묘사로만...

진다 / 고경옥 사월이 오자 벚나무 가지에서 다투어 발진이 시작된다 예고되지 않은 엽서가 도착할 때처럼 잠깐 떨다가 순식간에 퍼진다 붙잡아도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 붉은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뭇가지 위로 하얗게 발진이 번지고 있다...

미스 고 / 고경옥 간혹 지인들은 날 미스 고라 부른다 아버지가 주신 성姓 때문인지 구성진 트로트 가수 노래 탓인지 결혼을 했고 찰떡같이 쫄깃한 수많은 밤을 보냈고 아이를 낳았고 무엇보다 엄마가 늙은 것처럼 머리가 세었고 목주름이 선연해진 채...

길샘이 만난 시집- 고경옥의▪오후 여섯 시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 딱 일주일 고 경 옥 길을 가다 꽃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코 속으로 스미는 국화의 살 내음에 황홀하다 한 다발 들고 와 찰지게 사랑하며 보고 또 보고 난 며칠 뒤 화병 속...

오후 여섯 시는 사라지지 않는다 고경옥 가을이 가고 나면 빠르게 어둠이 질펀하다 미처 추스르지 못한 마음이 널브러져 있는데 순식간에 번지는 어둠 때문에 경계를 분간하기 힘들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 어둡고 스산하다고 밑줄 긋는다 경계가 명확...

-초경(初經)/고경옥- 중학교 일학년, 수박이 붉어지던 여름날 초경을 했다 두렵고 아프고 또 아팠다 피가 쏟아질 때마다 별의 뾰족한 각이 아랫배를 찔러 댔다 아무도 모르게 쪼그려 앉아 죄가 있다면 벌을 받아야 된다고 기도를 했다 우리 딸 이제 여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