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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시 관리실에 배달 부탁합니다.”라고도 써놓으셨다. 나는 어머니의 필체가 호미를 빼닮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특히 ‘ㅐ’, ‘ㅏ’, ‘ㅣ’와 같은 모음을 쓰실 때 어머니는 빨랫줄을 받치기 위해 바지랑대를 높이 들 때처럼 위로 치켜들어 쓰신다...

관한 시모음 36) 장마가 시작되던 날 /안영준 점잖던 하늘은 별안간 잿빛으로 둔갑하더니 큰소리치고 불 번쩍이며 봇물 터트린다 목말라 하늘에 입 벌린 천수답은 모처럼 장맛비를 흠뻑 머금고 양껏 배 불린다 강남제비 물 건너와 가가호호 문전 인사하고...

시모음 15) 게릴라 사랑 /조재도 흰 보시기 안에 짓찧어진 봉숭아 꽃잎 백반 넣어 질척하게 찧어진 봉숭아 꽃잎 조금치도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서 손톱의 딱딱한 심장부에 스미는 붉은 사랑! 게릴라같이 소리 없이 침투하는 흔쾌한 사랑 봉선화 /최해춘...

시모음 시계 / 김남조 그대의 나이 90이라고 시계가 말한다 알고 있어, 내가 대답한다 그대는 90살이 되었어 시계가 또 한 번 말한다 알고 있다니까, 내가 다시 대답한다 시계가 나에게 묻는다 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 내가 대답한다 내면에서 꽃피는 자아...

나비/김혜순- 내 왼쪽 귀와 네 오른쪽 귀로 만든 나비 한 마리 두 날개가 파닥이면 맞잡은 전신으로 파문진다 환한 날개 가루들로 네 꿈을 채워줄게 네 꿈속에 내 꿈을 메아리처럼 울리게 할게 귓바퀴 속 두 소용돌이가 환하게 공명한다 어쩌면 귀먹은...

시모음 28) 겨울 나무의 그리움 /이원문 허공의 파란 하늘 구름 더 높고 버리고 털어낸 나뭇가지 외롭다 겨울은 언제나 쓸쓸한 것인가 지나는 새라도 앉아 쉬어 가렴만 차가운 바람만이 나뭇가지 스치고 외로운 나뭇가지 앙상하니 떨고 있다 겨울이 없는...

놓은 모음 같은 발자국들.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어서 ‘미친’ 날들. 너와 외할머니는 노루가 되었을까. 이 시가 수록된 시집...듯한 고통 속에서 ‘49’는 ‘49제’의 기록을 의미한다. 이 시의 부제는 ‘스무이레’로, 미친 아이와 그 아이 곁을...

우 김혜순(1955~) 외할머니는 설거지를 하고 미친 너는 아침을 먹었다 아침을 먹다 말고 여전히 미쳐서 설탕 단지를 마루로 내던졌다 마루에 찐득거리는 별가루처럼 쏟아진 흰 설탕 그때 부엌에서 들려오는 이상하고 조그마한 소리 미친 너는 그 소리를...

[김혜순 시 모음] 팔십 년 긴 장마 김혜순 무서워 무서워 소금 기둥 위에다 비옷을 걸친 내가 지나간다 십 년 장마에 반쯤 녹아 키가 줄어든 내가 지나간다 검은 우산을 끄고 다가온 네 검은 안경테 밑에서 소금물이 줄줄 녹아내린다 그래그래 다 녹자...